지난 전시 Current Exhibition

손장섭 개인전
손장섭
손장섭 개인전
장소
관훈갤러리 전관
날짜
2012.04.11 ~ 2012.05.01

스스로 말하는 그림, 기억을 세우는 그림

 

 

박신의(미술평론가, 경희대학교 교수)

 

 

1. 방문

손장섭이 작품을 보이려 전시회를 연다. 일흔을 넘긴 그의 질기디 질긴 화가의 업으로 작품을 보이려 한다. 아니 이 나이라면 그림을 보여주려 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작품을 들고 나오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에게 그림은 그리는 게 아니라 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세월에 있어 그림이란, 세상의 모든 기억을 잠재우고 위로하는 일종의 미학적 연민의 행위가 아닐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퍼뜩 든다. 손장섭 만큼 세월과 기운이 깊어진 시기에 그려진 그림에서 어떤 변화를 볼 수 있을까?

그의 작품을 보러 파주의 작업실을 찾았다. 내게 네비게이션이 없어 동탄면 창만리 사거리까지 가서 전화를 하였고, 그의 지시를 따라 길을 가자 마중 나온 그와 마주쳤다. 시골의 한적한 풍경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려는 지점에 그가 나무처럼 서있었다. 아직 물이 오르지 않은 앙상한 가지로 하늘 보고 손을 흔드는 듯한 나무처럼,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휘고 기울어진 나무의 세월과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리고 흐드러지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는 미소, 그가 사람을 반기는 미소에는 늘 그런 표정이 있다. 아무 조건 없이 상대방에 깊은 신뢰를 품을 때 나오는 그런 미소로, 그는 나를 그렇게 맞았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A4 용지에 인쇄된 먼저 촬영한 작품 자료를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미처 촬영하지 못한 최근의 작품을 그는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이 <우리가 보고 의식한 것들> <해남 땅 끝>, 였다. 그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림이 젊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뭔가 날랜 몸짓과 붓질의 경쾌함과 같은 것? 혹은 속 깊은 가벼움으로 화면의 무게를 덜어낸 듯한 분위기? 혹은 시간과 공간이 투명해진 듯한 느낌? 혹은 얼핏 간파되는 서늘한 객관주의의 거리감? 어쩌면 조금은 현대적 분위기의 색조? 그래서 이 글은 그런 그림의 느낌으로부터 촉발되어 시작된 것이다.

 



2. 변화

 

손장섭에게서 발견된 일련의 변화는 이미 잠재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변화는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발견되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매체에 따른 변화가 더욱 크게 작용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유화 물감이 아니라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 점에 기인할 텐데, 손장섭은 파주로 터를 잡은 1995년 이후 2-3년간 유화 물감으로 그렸으나 1997년 이후로는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해 왔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 그만큼 그가 이루어낸 변화를 발견하게 될 기쁨을 예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보고 의식한 것들>을 보자. 전체적인 화면 구성은 위로는 금강산 풍경이, 아래로는 철책 사이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배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풍경과 사건을 말하는 이미지와 함께 ‘현실과 발언’ 동인을 비롯한 민중미술계와 사회문화계의 낯익은 얼굴들이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어찌 보면 이전의 작품과 매우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손장섭의 이전 작품들을 모아낸 것도 그렇고, 게다가 그의 친구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불러낸 것도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시간대의 자신의 모습을 배치한 점도 그렇다. 중앙 오른편에 <사월의 함성> 앞에 선 서라벌예술고등학교 시절의 자신과 그 아래 왼편에는 술자리에서의 자신, 그리고 맨 아래에 철책 사이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등 돌린 모습의 자신을 그린 것이다.

이야기 구조를 갖는 화면은 논밭을 가르듯 크고 작은 사각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비평적으로 가늠하고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이번 작품만큼은 그림 해독의 기회를, 그 즐거움을 그림 앞에 서게 될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자신의 그림을 모아내고 친구들과 자신을 등장시킨 부분은 일말의 회고적 분위기를 제공해 주고 있어, 일흔의 나이를 넘긴 화가가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고픈 것은 아닐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추측마저 유보하고 여기서는 이야기 그림처럼 펼쳐진 그 내용이 도식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전반적인 형상은 청회색의 색조를 유지하면서 볼륨을 주기 보다는 리니얼(linear)하고, 두터운 질감이 앞서는 대신 다소 평면적이고 투명한 공간감을 주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 형식이 이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뜨겁게 달구지 않고 서서히 식혀 각자의 존재감을 과하지 않게 드러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화가의 세월이, 그리고 그 시간이 그림 안에 고요하고 평평한 정적을 흐르게 하면서 모든 기억을 관조하듯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언뜻 무표정의 표정 같은 감정의 절제, 혹은 담백함이 비치는데, 그것은 화가의 주관을 버리고 기억 자체를 세우는 방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기억들을 투명한 상태로 놔두려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곧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게 만든 동인이었다고 나는 보고 싶다.

 

 


3. 표정

 

손장섭은 오래 전에 화가에게는 자기의 색과 기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자신은 투명과 불투명이 공존하는 것 같은, 수채화색도 아니고 유화색도 아닌, 불투명 수채화 같은 유화를 그린다고 했다. 그리고 청색을 언제나 강하게 써서 캔버스의 군데군데에 백색이 드러나게 했으며, 그 백색과 강한 청색은 유화의 육감적인 느낌을 줄이고 흡사 수채화를 보는 듯한 투명한 감을 준다고 보았다. 그 ‘투명’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으되 그는 유화의 (불투명한 속성에 내재한) 그 투명성 속에서 자신의 색을 느낀다고 말했다.(손장섭, 『공간』 1987. 6)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손장섭은 언제나 ‘매끈하게 뽑아내는 작품보다 자기 식의 표정에 대한 집착이 꽤 강했던 것 같다’(성완경, 1991). 그가 그린 수채화나 과슈 그림이 왜 남다르게 와 닿았는지, 유화물감으로 그렸을지라도 스스로 물감 고유의 효과를 죽이며 표현하려 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일테면 <6월 춤>(1988)을 위한 스케치와 그 결과인 수채 물감으로 만든 종이 부조를 봐도 그렇다. 그에게 6월은 소재에 대한 회화적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놀리는 붓질과 속도, 움직임의 순간에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처음 해 봤다. 또 유화물감으로 그린 <모정과 최루가스>(1991)조차도 인물을 그려낼 때의 속도감 넘치는 움직임에서 그 현실을 온 몸으로 받아낸 것이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손장섭의 투명과 불투명의 변증법은 대상에 대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화가가 느끼는 주제에 대한 일체감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회화적 표현을 주도하는 화가의 손놀림, 그리고 그 동작마다 화가가 시간과 색조를 일치시킬 때, 그 순간은 온전히 화가의 표정으로 남는다. 아크릴 물감은 건조가 빠르며, 진색 연색의 순서를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또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그릴 수 있고 유화처럼 표현할 수도 있어 다양한 기법을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는 재료다. 어쩌면 손장섭에게 아크릴 물감이 갖는 속성이 사물의 존재감과 실존적 의미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유화는 두터운 자기 감정을 쌓아가고 박탈감을 상징하는 색조를 기름지게 만들어 버려 그가 원하는 표정을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늘 그는 모든 그림을 완결된 작품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의 그림에는 미완의 혁명처럼 아직 해소되지 않은 염원 같은 것을 언제나 강하게 남겨놓았던 것이다.

 

 


4. 풍경

 

손장섭은 이번 전시를 위해 작품을 네 개의 주제로, 즉 역사와 나무, , 자연으로 구분하였다고 내게 설명했다. 물론 각각의 주제가 소재주의적 접근이 아닌 다음에야 상호 연관성과 순환적 의미체계를 갖는 것임은 분명하다. 오히려 모든 것은 ‘풍경’으로 일치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역사적 풍경, 삶과 노동의 풍경, 농촌과 어촌, 그리고 도시의 얼굴을 이어내는 화면에는 어떤 톤 다운 같은 맛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마치 화가의 의지와 정서를 최소화하고 대상 자체를 드러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일테면 <봄을 기다리는 산>(2008)이나 <북한산 비봉>(2009)에서처럼 색조의 단순화와 백색의 터치로 인해 자연을 표현했다기보다 그 형태의 뼈대를 드러내려 한 것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백색의 터치는 풍경 전반에 묘한 공간감과 시간대를 형성해주는 효과로 이어진다. 때로는 방금 세수한 맨 얼굴과 같은 순간의 체험과 느낌도 있다. 얼굴에서 막 물기를 제거했을 때와 같은 신선함과 긴장감, 그리고 편안함이 대위법적으로 공존한다. 그렇게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면 곧 흙탕물이 가라앉는 듯한 효과와 더불어 둘레의 사물이 환히 비친다. <남해바다>(2008)에서, <하늘 길>(2008)에서, <바다 길>(2009)에서, <백운대>(2009)에서 백색의 공간은 불필요한 사물을 모두 지우고, 문제를 집중하여 사물의 본래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2012) <해남 땅 끝>(2012)은 다른 작품과 달리 공간을 겹쳐내는 방식이 두드러지는 경우다. 손장섭은 최근 들어 단일한 공간으로 풍경을 그려내지 않고 여러 공간을 모아내는 방식을 자주 접하는 것 같다. 물론 분단 풍경을 그렸던 이전의 그림에서도 그러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철책’이라는 소재는 시공간의 구분을 해체하면서 다양한 역사적 순간의 시간을 서로 연결해주는 기능(<역사의 창(한반도), 2007-8)을 해왔음을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여러 공간을 겹쳐내는 방식이란 단절된 시공간의 틀을 이어내려는 변함없는 그의 의지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지금에 와서는 이전보다 훨씬 시각적인 규모를 줄이면서 각각의 공간에 위계질서를 부여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두드러지는 것은 손장섭의 나무다. 손장섭은 오래 전부터 신목(당산나무)을 그려왔다. 그런데 아크릴 물감으로 나무가 그려지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몇 백년된 나무의 형태적 깊이보다는 어떤 영성의 신비로움을 감지하도록 만들고 있다. 단색조의 톤과 백색의 터치가 주는 효과는 영혼이 서린 나무의 형상을 분명하게 만들어준다는 데 있다. 어쩌면 유화적 기법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맛을 살려 비교적 표현주의적 기법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얻어낸 효과라 하겠다. 신령이 나무를 통로로 하여 강림하거나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믿는 그 곳에 손장섭은 우리의 역사적 질곡과 시대적 상황을 투사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무는 그 자신과 동일시되어 역사를 ‘바라보는’ 또 다른 증인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5. 화가

 

본디 회화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염두에 둔 결과라고 늘 생각해 왔다. 그래서 화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에 끼어 고통 받는 존재다. 화가는 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만 그 너머의 연관관계를 읽어내면서 드러나지 않는 상처를 보고 쓰다듬고 어루만질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다. 손장섭은 그래서 그 모두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기 위해 그리며, 기억을 세우기 위해 그림을 살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림은 가시적인 세계로 우리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림은 가시적인 것을 심문하기 때문이다(존 버거).

물론 그런 그의 모습은 애초부터 있어 왔다. 성완경의 표현대로, 손장섭은 지금 발견되는 화가가 아니다. 그는 이미 우뚝 선 화가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는 오래 전부터 그렇게 거기에 우뚝 서 있는 큰나무, 동네 어귀의 큰 느티나무를 생각케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를 통해 새삼 확인한 부분은 그가 늘 자신과 가장 일치된 기법을 찾아왔던 화가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가시적인 것을 심문하기 위해 형태의 외양을 둘러싸고 있는 회화적 아우라를 탈각시키고, 모든 공간을 꽉 채우지 않고 비어있게 함으로써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염원의 의미를 강하게 남겨놓는다고 보았다.

아직 오지 않은 희망은, 그래서 그의 그림을 더 메말라 보이게 하고 입체적 형상보다는 뼈대를 드러내기 위해 무게를 들어내고 평면화 하는 것 같다. 무게를 들어낸다는 것은 곧 자신의 관점과 의지를 가볍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사물을 스스로 보이게 하고, 그림을 미완의 상태로 두어 비어있음 스스로가 말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씁쓸한 미소, 모든 것을 비워버린 듯한 표정과 눈빛, 이미 다 가졌고 이미 다 버린 사람이 가질 법한 표정, 따뜻한 표정의 깊은 우물 같은 눈빛, 모두를 바라보고 모두를 품으려는 것 같은 시선이 화면을 청회색조의 무덤덤함으로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동해 철책과 해오름 acrylic on canvas 97x162cm 2009


 
통일 전망대 acrylic on canvas 197x290cm 2009



 
탑 acrylic on canvas 200x400cm 2007-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