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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포에지(Poesie)
최경선
실존의 포에지(Poesie)
장소
관훈갤러리 1,2층
날짜
2012.08.15 ~ 2012.09.03
실존의 포에지(poesie)

 

 

“예술이란 일종의 넓은 의미의 언어이다. 이 언어의 도움으로 인간들은 서로 접촉을 시도하며, 이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남에게 알리고 타인의 낯선 경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한 예술가가 순전히 자기실현만을 위해서 창작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상호간의 이해 없는 자기실현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 그러나 자기 자신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더욱 안될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중에서-

 

 

 

최경선의 풍경은 네거티브 필름 즉 음화(陰畵)에 색을 입힌 초기 컬러사진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무의식이 출몰하듯이 낯선 세계로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드러나 있지만 숨기고 싶은 곳, 알고 있지만 밝혀내고 싶지 않는 곳에 대한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은폐되고 숨기고 싶은 세계가 모두 비의적인 것도 아니며, 반드시 매혹적인 세계도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은 혼동과 혼란의 세계의 반영에 가까워 보인다. 최경선은 바로 이 어둡고, 황량한 세계의 비참을 목도한 이방인-타자로서의 예술가적 자기인식을 견지하고 있는 존재다. 예술가는 이런 시대적 혼돈과 역사의 참혹함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그럼에도 그들은 생의 허위성에 맞서 어떻게 참다운 실존을 구가하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더불어 자기만의 내면의 목소리를 어떻게 빛나는 것으로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을 늦추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최경선의 실존적 미학의 관심 또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의 실존의 방법 중 가장 앙가주망(engagement)한 것이 이 세상에 하나의 아름다움을 보태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향한 노력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부터 태어난 예술이 결코 사회의 추함과 속세의 비참함을 피해 나가야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술적인 형상이란 항상 두 모순되는 존재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예컨대 예술가는 활력에 넘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멸한 것을 끄집어내고, 무한한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유한한 것을 불러오고, 유토피아를 추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디스토피아를 선택해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 또한 부조리한 모순 속에 얽혀있으며, 이 모순은 예술 속에서 조화롭게(?) 배치된다. 그리고 그 모순이 극단적일수록 예술은 마치 수수께끼같은 은폐된 세계에서 서서히 탈은폐(aletheia)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예술은 ‘드러냄’ 혹은 ‘노출’이 아닌, 숨겨져 있거나 은폐되어 있다가 서서히 혹은 갑작스럽게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탈은폐=알레테이아’이고, 이것이야말로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타자적 풍경, 풍경의 타자

삶의 풍경을 리얼하게 빚어낼 때 이미지는 오히려 단조롭고 판에 박은 듯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전형적인 풍경들은 오히려 보는 이의 부재를 요구하고, 관자로 하여금 풍경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최경선의 풍경은 바라보기 좋은 안일한 풍경도 아니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심리적인 풍경도 아니고, 망막에 호소하는 리얼리스틱한 풍경도 아니다. 오히려 살풍경에 가까운 작가의 화면은 공감을 요구하거나 자기 망각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작가의 살풍경은 관조할만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개 관조할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은 지각하는 주체의 소멸을 야기하곤 하는데, 최경선의 풍경은 어떤 형태의 관조도 일으키지 않으며, 오히려 반성하는 주체를 요구한다. 이러한 최경선의 풍경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이 낯설음과 난처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최경선 작업의 모티프는 크게 집과 아이들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의 이런 모티프는 그의 10여년간의 타국생활(베이징)을 통해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역동적인 변화의 한가운데 있는 베이징에서는 철거하는 집들, 생업으로 헝클어진 살림살이, 고단한 노동자, 그 와중에서도 어느 곳에서건 활기차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작가에게 이런 베이징의 풍경은 더 이상 이국적인 동경의 대상이 아니며, 암울했던 유년시절의 기억과 오버랩되기에 이른다. 작가는 특히 걷잡을 수 없는 변화 속에 소외되고 배제되는 타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방치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집과 아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작가의 화면은 음화, 즉 네거티브사진을 연상시킨다. 색채는 거의 금욕적이라 할 만큼 신중하게 선택되는데, 이렇게 절제된 색채는 억압된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 또한 잃어버린 공간을 되찾고자하는 절박함의 상징으로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세계가 왜 늘 단조로운 회색빛이어야 하는지, 왜 침울한 정서밖에는 안느껴지는지, 왜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는 늘 단편적으로만 드러나야 하는지, 무엇보다 색채에 대한 작가의 선입견과 편향성 또한 좀 더 숙고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2012년부터 화면에 새로운 모티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화지아오 나무가 중요한 상징으로 배치되면서 화면은 다소 활력을 되찾게 되었던 것! 화지아오는 산초나무 열매를 말하는데, 보통 ‘마라’라고 하는 이 향신료는 중국음식에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혀를 마비시켜 얼얼한 맛과 매운맛을 내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자극성이 강해 처음엔 오히려 적응을 못하지만, 이 맛에 길들여지면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맛이라고 한다. 사실, 이것이 무슨 나무인지 이해하기 전, 그것은 그저 살풍경과 꽃나무의 결합인지라 어떤 긍정의 메시지를 주려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빨갛고 탐스러운 열매와 가지의 기묘한 형태에 끌려 이 도상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 나무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물질문명에 길들여지는 현대의 인간 조건을 설명하기에 합당하다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빈집 혹은 언홈리

먼저 최경선이 그리는 집은 거의 빈집이다. 집은 콘크리트와 철골구조를 가진 획일적이고 삭막하며 차가운 현대적인 빌딩에 가깝다. 전혀 사람냄새와 온기를 잃은 빈집은 얼마나 낯설고 생경한가? 사람들이 더 이상 살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더 이상 쉬고 싶은 공간이 아닐 때,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그곳은 폐허 혹은 폐가처럼 낯설고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곳으로 변한다. 그래서 그곳은 일종의 수용소 같은, 잠시 머물 수는 있지만, 결코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비참한 곳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러한 집은 거의 허울뿐인 공간이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 공간을 피해 도망 나온 사람들처럼 보인다. 집을 배경으로 배치된 아이와 어른들은 마치 유령처럼 떠도는, 갈 곳 없는 영적 부랑아들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감정이 최경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이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집은 무엇인가? 그곳은 인간의 영혼이 쉬는 곳, 타자로 대표되는 아이들이 행복한 곳이다. 그러기에 집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회귀해야할 곳, 영원한 곳, 자궁 같은 곳이다. 그런데 그 집은 비어있고, 폐허가 되었다. 폐허가 된 집은, 집을 잃어버린 자들의 삶 즉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에 대한 메타포이며, 인간 영혼의 피폐함의 상징이다. 그러니 빈집을 보며 그렇게 불편하고 불안했던 이유에 대한 해답을 얼마간 얻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며,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더군다나 실존주의적으로 예술가는 이중으로 소외된 자들이다. 기성의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사회로부터, 즉 지배적 가치로부터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안일한 삶으로부터 그렇다는 말이다. 즉 작가는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소외시키는 자, 경계에 선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런 빈집 앞에서 아이들이 논다. 아이들은 열심히 놀이에 집중되어 있듯이 보이지만, 조금은 위태로워 보인다. 실상, 위태로운 건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일 것이다. 더 섬세하게 말한다면, 작가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풍경 속 아이들이 자신들의 열악하고 위험한 생존 조건을 작가에게 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는 메를로-퐁티가 주목한 “그러므로 풍경화는 나를 통해서 스스로를 사유하며, 나는 그것의 의식으로 성립된다”는 세잔느의 말을 환기시킨다. 세잔느는 “풍경이 내 속에 들어와서 자기 생각을 한다”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예술가는 더 아픈 존재들한테 자기 몸을 비워주는 영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경선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선과 응시가 교차되는, 사유하는 풍경화가 된다. 그런 까닭에 관자로 하여금 여전히 낯설고 생경하고 불안한 감정을 주는 것이며, 바로 그 그런 이유 때문에 관자들은 생생히 깨어서 풍경이 전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최경선 회화가 지니는 ‘반성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동시에 그 생경하고 불편한 감정은 또 예술가의 무력감을 그대로 전해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실존은 아이들의 생존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아이의 생존이 위협받는 땅에서 예술은, 도대체 그림은 “벽에 붙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말이다. 최경선 작품을 보는 내내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러한 무력감이 온전히 관자에게 전달되는 까닭이다....(중략)

 

 

실존의 포에지(Poesie)                                                                                                                                                                           유경희(미술평론가/ Ph.D.) 

 





 

잊혀진낙원 193.9X130.3cm Oil on canvas 2012



 


 

 

길이사라지려고할때 140X110.3cm Oil on canvas 2011

 


 

 

풀자라는집 116.8X91cm Oil on canvas 2012